사도신경 강해 (10) - "성령을 믿사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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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서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가장 크게 나누는 기본 틀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고백입니다.
모든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고백인 사도신경의 구조부터 이미 삼위일체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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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라는 학자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심장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최초의 이단이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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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삼위일체 신앙이 무너지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심장이 꺼진 인간은 생명을 잃기 때문이죠.
또한 이 심장이 꺼지거나 혹은 심장의 기능이 잘못되는 동시에 잘못된 신앙, 왜곡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성령에 대한 고백과 성령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신 일에 대한 신앙 고백을 3주간 보게 될 겁니다.
오늘의 고백은 바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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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기 쉬운 성령님에 대한 두 가지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능력’이나 ‘힘’ 정도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혹은 성자 예수님이 일하실 때 나타나는 능력, 힘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인격이 없이 그저 성부, 성자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도구처럼 이용되는 에너지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오해이며,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와 다릅니다.
성령은 독립적 인격을 지니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능력이나 힘이 아닌, 한 인격을 가지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죠.
둘째로, 성령님에 대한 오해는 성령 충만에 관련된 것인데,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표현을 뭔가 감정적으로 격정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그것을 성령 충만하다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라고 할 때 예를 들면 찬양을 드리다가 눈물을 흘리거나, 그 격정적인 감정을 느꼈을 때 성령이 충만하다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지 않죠. 성령님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안에 언제나 내주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감정이 격정적일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죠.
오히려 감정이 평온할 때 성령의 충만함이 더 나타나기도 합니다.
본론
성령님에 대한 오해를 서론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를 풀고,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령님은 그러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세 가지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성령님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1. 거하시는 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께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생의 말씀, 구원의 지혜 그 자체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결국에 이 땅을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인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가장 먼저 간 부대가 통신중대였어요. 중대에는 중대장님이 저의 상사로 계셔서 사실 모든 책임권이 중대장님께 있습니다.
저는 중대 밑에 소대를 맡은 소대장이라서 사실 저는 중대장님께 보고만 잘 하면 저의 책임의 무게가 덜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저는 중대장님을 업무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대장님이 성격은 좀 과격했지만, 장교 후배를 오랜만에 받으셔서 저를 상당히 잘해주시고, 보호해주시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약 7개월 후에 부대를 옮기게 되는데, 그때는 통신소대로 갔습니다.
그러면 그 통신소대에서 리더가 저거든요. 위에 중대장이 없어요.
그때 제가 가면서 아주 큰 불안을 느꼈었거든요? 왜냐하면 이전까지 책임권을 중대장님께 넘길 수 있었고, 보호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제가 그런 역할을 해야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아주 불안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없이 이 땅을 살아가야한다고 생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 땅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내주실 성령님은 제자들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 ‘속에’ 계시는 분입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 안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자로 “내주하시는 분”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그 안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게 될 모든 죄악과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 가운데 승리해나가도록 이끄십니다.
또 교회가 생존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모든 사역을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성도들은 그 거룩한 사역을 해나가게 됩니다.
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까? 예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악과 어둠이 여전히 공존하는, 잔존하는 이 시대 속에 고아처럼 버려두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거하게 하시어 우리를 향한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2. 가르치시는 분
성령님은 거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그들이 참된 제자들이 되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가르침인가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깨닫게 하는 그 가르침을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받았던 것입니다.
그 말씀의 가르침 안에는 영생이 있었고, 제자들은 그 풍성한 가르침을 사모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주는 일인 것입니다.
생명과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 제자들은 그 말씀의 원천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가르침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불안함에 휩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즉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야했던 말씀의 가르침이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신학을 배운 분들은 “조명하심”이라는 단어에 참 익숙한데, 이 표현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성도들에게는 상당히 익숙치 않은 단어입니다.
이 조명하심이라는 것은 곧 하이라이트, 무언가를 비추는 것입니다.
조명하심을 어디에서 많이 말하면, 성경론에서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성경 말씀을 알고, 깨닫는데 우리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되는 그 과정 중에 바로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있게 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게 하시고, 말씀을 비추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장 기본 자세가 무엇입니까? 성령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비추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비추시고 가르치실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3. 증언하시는 분
세번째로 성령님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무엇을 증언할까요?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사역을 증언하십니다.
제가 사도신경 강해 초반부에 많이 말했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어떻게 이루어나가시는지요.
성부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계획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구원 사역을 성취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적용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적용이라는 이 표현이 곧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구원 사역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게 되는 그 모든 전제 조건을 완벽하게 해내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 사역을 사람들에게 증언하셔서, 예수님이 구세주 되시고, 그들에게 구원 사역을 적용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사역을 객관적으로 다 성취해놓으십니다.
그런데 이 성취해놓으신 구원 사역의 효력을 인간 한명, 한명에게 적용시키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안에 거하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 모든 분들이 믿음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한 분들은 그 믿음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증언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분이십니다.
4. 그렇다면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가르치시고,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영원히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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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결국 우리가 알아봤던 세 가지 성령님의 사역 즉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민감하게 경험하고, 그 가르침과 인도에 따라 살아가며, 성령님께 의존하여 살아가는 인격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특별한 황홀경 가운데 그 인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서론에 언급했던 오해, 즉 감정적으로 격정적일 때 성령님이 임재하신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사실로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가 감정적으로 격정적이지 않을 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이 어떻든 언제나 영원히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격적으로 성령을 따르는 삶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한 구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인격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이러한 열매들은 우리를 이 땅에 어떠한 법도 우리를 막을 수 없는, 천상의 법, 하늘의 법을 따르는 자들로 인도합니다.
적용)
우리 시대는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아갈 때, 그리고 그것만으로 세상을 독자적, 독립적으로 살아갈 때 삶의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거죠.
만약 여러분이 삶을 살아갈 때 충분히 여유롭게 살아가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능력이나 여러분이 아는 것으로 자율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그 삶은 가치없는 삶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인간이 가진 자유를 충분히 누리며,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매우 쿨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아는 것을 통해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고아처럼 두지 않으시기 위하여 그 사랑과 은혜의 마음으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랐던 것처럼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삶을 바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성령님께 의지하는 연약한 자들이 되길 원해서 그러셨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진리가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진리의 말씀인 예수님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증언하시며,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에는 다다를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진리 그 자체시며, 진리인 예수를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의지하길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제가 우리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저는 이 아이가 일어나 걸을 때까지 이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양육, 교육하고 안고 다닐 것입니다.
제가 이 아이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저는 뛰기 전까지 옆에서 잡아주고, 일으켜주며 함께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스스로 공부하기 전까지 옆에 함께 하며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입니다.
제가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과 지혜를 알려주기 위해 옆에서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가 저를 의존하는 것이 나약하고 부족한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기가 저를 의존하는 것은 나의 자녀로서 충분히 누릴 권리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아이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면 저는 학대하는 아버지입니다.
혹은 이 아이가 자발적으로 그러한 저의 양육의 권리를 거부한다면 이 아이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성령님을 의존하는 것이 나약하고 부족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분히 누릴 권리입니다.
만약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성령님을 보내신 예수님은 학대하시는 분이며 이는 곧 하나님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발적으로 성령님의 함께 하심의 권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아주 어리석은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며 성령님과 함께 교제하시고, 충분히 가르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성경을 통해 가르침 받으실 때 간절히 성령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나를 가르쳐주시고, 나를 길러주세요.
이 땅에서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고백하오니 저에게 알리시고 가르쳐주세요.
진리를 더욱 바랍니다. 더욱 알려주시옵소서.
이러한 삶을 통해 어려분은 충만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온전하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결론
